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나의 두 번째 엄마가 돌아가셨다

by Adelife 2022. 11. 27.
728x90

두 번째 엄마?

그분은 나의 시어머니이다. 언어가 다른 엄마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날 잘 이해해주셨고, 시어머니 같지 않으신 분이었다. 언제나 내 편이었고, 나의 파트너 비자받을 때 감사하게도 증인으로 해주셨던 분이다. 그런 좋은 분이 흑색종을 갖고 계신 것을 알게 되고 일 년 반 만에 하늘나라로 가신 것이다. 

 

흑색종을 발견한건 2021년 5월 그리고 우리 곁을 떠나신 날은 2022년 11월 26일. 왼쪽 귀 아래, 귓불 옆에 혹 같은 게 있어서 조직 검사를 하니 멜라노마라고 했다. 조직검사하러 같이 가드렸는데, 내가 그 옆에서 같이 있다가 내 인생 최초로 쓰러져 버렸다. 아마 너무 충격을 받았나 보다. 그때 시어머니도 놀라셨다.

 

그러고 나서 2021년 1월에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맥박도 빠르고) 체온도 높아지셔서 응급실에 두어 번 가시고 괜찮아지셔서 집에 다시 오시곤 했다. 이뮨 세러피라는 것도 규칙적으로 하셨는데 그것마저도 신장 기능이 좋지 않을 땐 이뮨 세러피도 못하고 그러셨다;

 

그러던 어느 4월쯤인가, 그땐 뇌에 암이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뇌종양인 것 같다. 그래서 방사선 치료를 하시기로 하고 2022년 7월 중순에 방사선 치료를 매일 가는 것으로 10회 동안 하시는 걸 보았다. 난 그게 조금 이상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방사선 치료를 한다고 하면 몇 주에 한 번 한다든지 이렇게 텀을 두고 하는데 여기서는, 아니 적어도 시어머니 경우에는 주말 빼고 10회를 하더라. 참 이상했다. 방사선 치료 끝나고 나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얼마 후에 점점 힘이 없어진다면서 walker를 끌고 다니셨다. 그러고 집 안에서 다니시다가 넘어지실 때도 있었다. 집안일도 점점 힘들어지시고 스스로 끼니를 때우시는 것도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우리 집에 오시라고 해서 한 일주일 계시다가 가셨다. 그러고 한 또 일주일 후에 10월 19일에 시어머니의 언니인 마리 이모님이 오셨다. 이모님은 시어머니를 도와드리고 같이 계셔서 우리는 마음은 조금 놓을 수 있었다.

 

걱정과 슬픔의 때가 슬슬 오고 있다.

11월 12일 토요일 새벽 4시에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마리 이모님이 연락 오셨다. 지금 시어머니가 너무 힘도 없고 힘들어한다고 구급차를 불렀다는 것이다. (여기는 구급차를 부르면 적어도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앰뷸런스를 타고 원래 다니시던 종합병원으로 입원하셨다. 톰과 나는 오전에 할머니를 뵈러 갔다. 역시 힘이 없는 모습이셨고, 화장실에 가실 힘이 없어서 간호사들이 도와주어서 침대에서 볼일을 보셨다. 

그리고 그 며칠 후에는 그런대로 괜찮아지셔서 물론 간호사의 부축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화장실도 가실 수 있었다. 

 

클라이맥스는 시어머니의 생일인 11월 17일이다. 그날은 다행히 내가 일하지 않는 날이라 병원에 가서 생신 선물과 생일 카드를 들고 (그리고 특별히 집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커피도 갖고) 갔다. 시어머니의 친구분들 세 분이 계셨고, 마리 이모님도 계셨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라 그런지 막내아들이 멜버른에서 전화했을 때 힘차게 전화하셨고 꽤 컨디션도 좋으셨다. 

 

이제 마지막 길

생신 이후 좋아지시거나 하는 그런 건 없이 계속 힘이 없으셨고 가서 뵈면 눈을 감고 계신 날이 더 많았다. 11월 24일 목요일 저녁 먹고 뵈러 갔는데 이미 의식은 없으신 혼수상태였고, 자는 도중 뒤척이며 자세를 바꾸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지만 잘 못하셨다. 그리고 우리 왔다고 손 잡아드리고 말 해도 깨지 않으셨다. 산소호흡기와 소변줄을 끼고 계셨다. 

11월 25일, 담당의사가 더 이상 항생제나 주사나 산소호흡기를 꽂지 않고 호스피스로 가는 게 어떻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병원에서 하는 어떠한 조치도 이제 안될 것 같다는 것이다. 

11월 26일 토요일, 오전에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셨다. 내가 도착했을 땐 2시쯤인가 그랬는데, 입을 벌리고 숨을 아주 거칠게 쉬고 계셨다. 숨 쉬는 것이 세상 가장 힘든 일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서 나의 두 번째 엄마는 편안하게 가셨다.

 

너무 빨리 가셔서 자식 입장에서는 너무 당황스럽고 슬프다. 하지만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오히려 고통도 덜 하고 일찍 가신 것이 복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예전에 시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에 와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너무너무 생각나고 벌써 그립다. 여기 어딘가에 계실 것 같은데 말이다.

댓글